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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의 유물 : 피보다 붉은 약속, 광복군 박영준·신순호 결혼증서
기간/ 2014.09.24(수) ~ 2014.10.27(월)
장소/ 경기도박물관 상설전시실(역사실 앞)

경기도박물관(관장 이원복)에서는 결혼의 달 10월을 맞이하여 <문화가 있는 날! 기념 – 이달의 유물> 코너에 ‘광복군 박영준·신순호 결혼증서’를 선보인다. 이 증서는 독립운동가 남파 박찬익(南坡 朴贊翊, 1884∼1949) 선생의 손녀 박천민씨로부터 2013년 기증 받은 문서이다. 일제강점기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발행한 것으로 남아 있는 예가 드문, 매우 희귀한 결혼증서이다.

대한민국 25년(1943년) 12월 12일, 박영준과 신순호의 결혼을 알리는 붉은 색의 문서. “우리 두 사람이 오늘 부부를 맺고 한 마음, 한 뜻으로 일생을 지내기로 맹서하고 이 글월로 증거를 삼음”이라고 쓰여 있는, 오늘날의 결혼서약과 크게 다르지 않은 평범한 문서이다.

하지만 여느 결혼증서와는 다른 점이 있으니 바로 주례와 증혼, 소개한 사람의 이름에서 풍기는 강한 기운이다. 결혼증서 중앙에 적힌 김구, 조소앙, 엄항섭, 민필호는 누구인가. 김구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다 아는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의 지도자로 추앙받는 분이 아니던가. 경기도 파주 출신의 조소앙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독립 이후 새로운 국가건설의 길을 제시했던 분이며 엄항섭, 민필호 역시 임시정부를 지키고 조국의 독립에 일생을 바친 유공자셨다. 독립선언서에나 있을 법한 이름이 왜 결혼증서에 등장한 것일까. 그 이유가 궁금해진다.

결혼증서 속 신랑 신부인 박영준, 신순호는 독립운동가 집안의 자손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인물이다. 남정 박영준(南庭 朴英俊, 1915∼2000)은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으로 중국과 핵심적인 외교 활동을 펼쳤던 남파 박찬익의 셋째 아들이다. 아버지의 대를 이어 독립운동에 생을 바친 것이다. 중국 류저우[柳州]에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 참가를 시작으로 임시정부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한국광복군 제3지대 제1구대 대장 겸 제3지대 훈련총대장 등 항일독립투쟁의 최전선에서 활동하였으며, 광복 후에는 대한민국 국군으로 활약하였다.

신부인 신순호(申順浩, 1922∼2009)는 독립운동가 삼강 신건식(三岡 申健植, 1889∼1955)의 외동딸이자, 예관 신규식의 조카이다. 1938년에는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들어가 항일 운동에 참여했고, 1940년 한국광복군이 창립되자 여군으로 입대해 활동하였다.

두 사람의 인연은 박영준이 17세 때 아버지를 찾아 상해로 온 후 신순호의 집에 한동안 머물면서 시작되었고,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서는 일원으로 같이 활동하였다. 또한 신규식과 박찬익은 의형제까지 맺은 절친한 사이였으며, 박찬익 선생이 가족과 떨어져 투병 중일 때 신순호와 신순호의 어머니가 보살필 정도로 집안끼리도 매우 가까웠다고 한다. 신순호의 예전 인터뷰에 따르면 당시 임시정부 지도자들이 한데 모여 살았기 때문에 자녀들도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고 하니, 이들의 결혼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을 수도 있다.

1943년 12월 12일, 중경 오사야항(重慶 吳師爺巷)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강당은 임시정부 요원들과 한인 동포들로 가득 찼다. 결혼식은 당시 외무부장인 조소앙의 사회로 시작되었고, 백범 김구(白凡 金九, 1876~1949)의 주례와 조완구·김원봉·김성숙 등 각 당 대표들의 축사가 있었다. 머나먼 남의 땅에서 온갖 고난을 견디며 살아가는 한인들에게 이 날은 얼마나 기쁜 날이었을까. 붉은 결혼증서에서 그 기쁨을 모두 읽어낼 수는 없으나, 남녀의 결합을 넘어선 동지간의 끈끈한 결속이 느껴지는 듯하다. 결혼의 계절 10월… 피보다 더 붉은 종이에 배인 어느 독립운동가의 맹세가 지금 우리를 전율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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