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묘·병자 두 차례의 호란이 조선사회에 던진 충격파는 매우 컸다. 한낱 북방의 오랑캐 정도로 여기던 청에게 당한 치욕적인 패배와 이에 따른 수모는 지배층과 민중에게 커다란 굴욕감을 안겨 주었다. 그 결과 조선에서는 청에 당한 수치를 씻고 복수해야 한다는 북벌론이 사회적 담론으로 형성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갔다가 돌아와 왕위에 오른 효종(孝宗, 재위 1649~1659)은 세자시절부터 계획하고 있었던 북벌사업을 실천에 옮기고자 하였다. 그는 이완(李浣, 1602~1674), 원두표(元斗杓, 1593~1664) 등과 함께 산성을 보수하고 군제개혁을 실시하여 군사력 증강에 힘썼다. 이와 함께 군비확충을 위해 대동법을 실시하여 군수 재정도 상당부분 안정적으로 충당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이완은 어영대장과 훈련대장을 맡으면서 군사문제에 관한 효종의 자문에 응하고 각종 군제개혁 사업을 주도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정책은 효종과 그 친위세력을 중심으로 진행되어 대다수 정치세력의 동의를 얻지 못한 채 추진되었다. 또한 청의 국력이 날로 커지고 흉년과 자연재해가 겹쳐 백성의 부담이 커지면서 북벌을 반대하는 목소리도 커졌다. 결국 효종은 집권 후반 정국의 주도권을 상실하게 되었고 그 타개책의 일환으로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을 중심으로 한 서인세력과 손을 잡았지만 ‘북벌’에 대한 노선의 차이로 실행되지 못하고 효종의 죽음으로 북벌 계획은 자취를 감추고 만다.
전시된 자료는 이완(李浣, 1602~1674) 장군이 생전에 사용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투구와 창으로 경주이씨 구당공파 정익공 중중에서 기증한 유물이다. 철로 된 종형투구 전면 하단에는 당초무늬를 금으로 상감한 얇은 판을 둘러 장식하였다. 투구 상단에는 금으로 상감한 용·연꽃·당초무늬 등을 투각으로 장식하였고, 중심에는 술을 달 수 있는 팔각형의 대가 있다. 창날은 단면이 삼각형이고 한쪽 면에 홈을 파고 금을 입사하였다. 창날과 나무 손잡이 연결부분에는 황동으로 만든 띠를 둘러 장식하였다.
이번 전시는 2016년 8월 31일(수)까지 경기도박물관 상설전시실 입구에 전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