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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중부일보4.3/한강 북쪽 한성백제 신호탄 올랐다
admin - 2001.04.04
조회 3949
제목 : 한강 북쪽 한성백제 신호탄 올랐다

한강 바로 남쪽 서울 송파구 풍납토성이 뇌관을 터뜨린 한성백제(BC 18-AD 475 년)가 한강 이북에서도 파주 육계토성에 이어 포천 자작리 유적이 발굴됨으로써 그 실체 규명을 위한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문헌 기록으로 볼 때 온조왕이 건국한 백제는 서기 475년 고구려 장수왕에게 풍납 토성을 중심으로 한 왕도 한성(漢城)이 함락당해 웅진으로 서둘러 천도하기까지 500년 가량이나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반도 중부 일대를 장악했다.   하지만 아주 희한하게도 한강 본류를 중심으로 그 남쪽 지역에서만 백제 흔적이 농후했을 뿐 북쪽에서는 좀처럼 ‘이것이 백제다’라는 뚜렷한 확신을 가질 만한 유 적이나 유물이 확인되지 않아 고고학계와 고대사학계가 애를 태웠다.  특히 90년대 중·후반 들어 서울 성동구 구의동 보루와 아차산 및 용마산 일대를 비 롯한 한강 북쪽 소규모 군사초소 시설인 이른바 보루 유적이 고구려가 축조한 것 이라는 주장이 제기된 이래 한강 북쪽에서의 백제 열세 현상은 두드러졌다.  하지만 지난 96년 홍수가 휩쓸고 간 뒤 맨살을 드러낸 파주 육계토성에서 서기300 년 무렵 백제 흔적임이 분명한 대규모 유적이 발굴되면 한강 북쪽에서도 백제는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육계토성은 강(임진강) 바로 남쪽 가에 흙으로 쌓은 점에서 그 입지 조건이 백제 왕성인 풍납토성을 빼다 박은데다 발굴 결과 길이 17.5m, 폭 10.8m인 呂(여)자형 대형 주거지를 비롯해 군사적 색채가 농후한 각종 백제 유물이 출토됐다.  하지만 이곳 출토 목탄에 대한 탄소연대 측정 결과 서기 300년 무렵 축조된 이육계 토성을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불신하는 학계 일부에서는 백제 유적으로 보지 않 고 이른바 마한 54개국중 한 곳의 중심지로 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지난해 12월 이후 최근까지 육계토성과 가까운 포천군 포천 읍 자작리 유적이 발굴됨으로써 그 근거를 상실하게 됐다.  경기도박물관이 2일 공개한 자작리 조사 성과에 따르면 이곳에서는 한성 도읍기백 제 주거지로는 규모가 최대인 길이 23.6m, 폭 13.2m 짜리 초대형 주거지가 확인됐 으며 한성 백제 중심지인 풍납토성 및 몽촌토성에서만 확인된 원통형 토기와 부뚜 막 시설을 비롯해 전형적인 백제 유적과 유물이 출토됐다.  육계토성이나 자작리 유적은 그 축조의 주인공이 한성백제임은 육계토성 발굴이 끝난 뒤에 시작된 풍납토성 조사로 비로소 확신을 갖게 됐다. 즉 육계토성이나 이번 자작리 출토 유물과 유적은 거의 모두 풍납토성에서 고스란 히 확인되고 있다.  예컨대 쌍둥이처럼 닮아 있는 육계토성과 자작리의 呂자형 대형 주거지 자체는 물 론이고 이곳에서 확인된 부뚜막 시설과 원통모양 그릇받침대, 대형 독 등은 풍납 토성에서 이미 아주 많은 사례가 보고되고 있다.  따라서 풍납토성 발굴은 한성백제 중심지를 찾은 것은 물론 수백년 동안 그 영역 이었음이 확실함에도 그렇다는 뚜렷한 확신을 가질 수 없었던 한강 북쪽 일대 유 적과 유물의 진정한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가려 주고 있다.  선문대 이형구 교수는 ‘풍납토성 발굴로 한국 역사고고학은 일대 전환기에 접어들 고 있다’면서 ‘특히 한강 북쪽 지역의 경우 보루나 성터 유적을 고구려 혹은 신라 가 쌓았다는 주장이 통용되고 있으나 전면 재검토가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포천=김진규기자/pogija@joongb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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