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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문화답사 1차 참가자 안내
admin - 2008.04.03
조회 5931



답사 세부 일정

시 간

일정내용

비 고

오전 8:00

박물관 정문 주차장 집합
참가자 확인

* 정시 출발!!

8:00~10:30

한국고건축박물관 도착

학예사 해설

10:30~11:30

한국고건축박물관 관람

입장료 개인부담

11:30~13:00

- 점심식사-
보부상유품전시관, 충의사 등 자유 관람

충의사 야외 잔디
자유시간 - 비누방울 놀이

13:00~14:00

화전리 사면석불


14:00~16:00

향천사

총무스님 설명

16:00~

예산 출발


18:00

박물관 도착 및 해산


준비사항
- 야외 잔디에서 먹을 수 있는 점심 도시락 및 간식, 음료수
* 부근에 작은 식당이 하나 있기는 하나 도시락을 적극 권유합니다.
* 우천 시 인근 식당 권유
- 한국고건축박물관 입장료 : 개인부담
* 특별할인요금 : 어른 1,500원 / 초등학생 이상 1,000원
- 날씨에 맞는 간편한 복장


답사지 안내
Ⅰ. 백제시대의 역사와 문화
삼국(三國) 가운데 하나인 백제는 지금의 서울, 경기도, 강원도, 충청남북도, 전라남북도 지방에 걸쳐 있었으며 일본에 큰 영향을 끼쳤던 왕조이다. 부여계 이주민들이 한강 유역에 세운 백제국伯濟國이 점차 마한 지역을 통합하면서 성장한 나라이다. 그 후 도읍을 웅진(熊津, 지금의 공주), 사비(泗比, 지금의 부여)로 옮기면서 독특한 문화를 꽃피웠다.

한강 유역에 도읍한 한성시대(기원전 18-기원후 475년)는 개방적이고 국제적인 백제 문화의 기틀이 마련된 시기이다. 이러한 특징은 석촌동 무덤과 몽촌토성ㆍ풍납토성 등의 생활 유적에서 확인된다. 웅진시대(공주 475-538년)는 중국의 선진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문화 강국으로 발전한 시기이다. 이는 중국 남조와 관련성이 엿보이는 무령왕릉과 그 출토 유물로 미루어 알 수 있다. 사비시대(부여 538-660년)는 참신한 조형 감각과 세련된 공예 기술이 발달한 백제 문화의 절정기이다. 이 시기에 백제인의 정신세계와 예술적 역량이 함축된 백제금동대향로가 만들어졌다. 한편, 백제 문화는 일찍부터 왜倭에 전해져 일본의 고대 아스카(飛鳥) 문화가 형성되는 데에도 영향을 미쳤다.

백제는 기원 전후 무렵에 고구려와 같은 갈래인 부여족의 유이민(流移民)이 한강 유역에 내려와 마한지역을 통합하면서 고대국가로 성립을 이루게 된 나라이다. 따라서 백제문화는 근본적으로 고구려의 영향과 그 전통 속에서 전개되어 나간 것이 분명하지만 지리적인 조건, 즉 한강 유역의 비옥한 자연환경과 중국의 남조 쪽의 문화적인 영향을 받아들임으로써 점차 고구려와는 확연히 구별되는 백제 특유의 온유하고도 세련된 성격으로 변모되어 갔다.

한편 금강유역을 중심으로 한 충청남도 내륙지역은 예산의 남서리, 아산 남성리 그리고 부여 연화리 등의 청동기에서 볼 수 있는 정교한 주조기술로 미루어 가히 이 지역이 한국 청동기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음을 실감케 한다. 따라서 백제의 금속공예가 1971년 발견된 무녕왕릉 출토품과 같은 놀라운 수준의 금속공예품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지역적인 특수성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다. 즉 진보적인 청동기 문화를 소유하였던 마한지역의 전통을 바탕으로 하여 한대 및 고구려의 발달된 금속공예기술을 받아들일 수 있었기에 백제의 금속공예술은 더욱 찬란하게 꽃피우게 된 것이라 짐작된다.

이러한 백제는 4세기 말경부터는 고구려 광개토왕의 남진정책과 왕위를 둘러싼 정권다툼으로 인하여 국가기반이 흔들리면서 문주왕대(文周王代)인 475년 수도를 한성에서 웅진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 후에도 백제는 웅진에서 다시 사비로 수도를 옮기게 되었는데 웅진으로 천도하기까지를 한성시대(4세기 초∼475년)라 하며 웅진 천도부터 사비 천도까지를 웅진시대(475∼538년), 그리고 부여로 도읍을 옮긴 538년부터 백제멸망까지의 123년간을 사비시대로 부르고 있다. 이와 같이 백제는 삼국가운데서도 유일하게 그 수도를 세 번이나 옮겨 조성함에 따라 백제문화를 시기적으로 구분하기가 용이하며 고고학적, 미술사적인 유물, 유적의 시대편년의 기준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백제에 불교(佛敎)가 전래된 것은 침류왕(枕流王)때에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동진(東晋)으로부터 들어오게 되면서였다. 이때 왕은 그를 맞이하여 궁중에 두고서 예(禮)로서 공경하였으며, 이듬해에는 서울에 절을 짓고 승려 열명을 두었다. 이로부터 백제에는 왕실의 보호 하에 불교가 널리 퍼지게 되었다. {주서(周書)}에 "승려와 절과 탑(塔)이 매우 많다"고 한 것이 그러한 사실을 잘 알려준다. 이러한 까닭에 백제의 불교는 개인의 현세이익(現世利益)을 구제하는 것보다는 나라의 평안과 발전을 비는 국가불교(國家佛敎)로서의 성격이 더욱 강하게 나타났다. 더불어 이상사회(理想社會)를 희망하는 미륵신앙(彌勒信仰)이 유행하게 되는데, 이때의 국왕은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된다. 무왕(武王)이 익산(益山)에 세운 미륵사(彌勒寺)는 그 중심사찰이었다. 이렇듯 국가불교가 널리 성행하였지만 개인의 구제(救濟)를 위한 대중신앙(大衆信仰)도 널리 유행하고 있었다. 중생이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관음보살(觀音菩薩)의 이름을 부르게 되면 즉시 달려와서 구제해준다는 관음신앙(觀音信仰), 아미타불(阿彌陀佛)이 있는 서방정토(西方淨土)에 왕생하고자 하는 미타신앙(彌陀信仰), 중생이 질병으로 인한 고통에 처해 있을 때 이를 도와준다는 약사신앙(藥師信仰) 등이 그러한 예이다. 이상과 같은 백제의 불교는 이웃 나라인 일본에 전래되어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것은 현재 일본에 남아 있는 여러 유물들과 문헌에 나타나는 기록으로 미루어 충분히 알 수 있다.

우리나라 백제시대의 건축은 목조건물이 남아 있지 않으므로 그 우아한 모습으로 상상되는 실체를 볼 수 없어서 아쉽게 한다. 그러나 동양에서 최초로 목조건축을 석조로 번안하여 축조한 미륵사지 서탑은 백제시대의 우리나라 석조 건축문화가 매우 뛰어난 수준에 이르러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미륵사지 서탑 이후에 나타나 있는 정림사지 석탑은 더욱 세련된 조형미를 내포하고 있어서 보는 이로 하여금 당시 백제건축의 아름다움에 대한 상상을 무한하게 한다. 백제의 건축은 시대적 배경과 함께 남아 있는 유구를 고찰해 보았을 때 당시 동양의 건축문화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위치에 있음을 실감나게 한다.

특히 백제의 문양은 백제미술의 성격을 드러내는 중요한 조형적 특징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백제 문양은 단순히 사물만을 표현한 것에서 시작하여 저마다 상징적 의미를 지니면서 각 미술의 영역에 활용되고 있다. 즉, 일반 생활용구라 할 수 있는 토기나 수저, 건축부재인 수막새나 암막새, 전돌, 금속공예에 해당하는 금관이나 귀걸이, 불교미술에서 흔히 제작된 금동불상이나 석조불상들과 부처의 빛을 나타내는 광배 등 다양한 기능과 용도에 맞게 문양은 표현되었다. 이러한 문양은 같은 연화문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건축부재인 수막새에 나타난 모습과 종교적 숭배심에서 제작된 부처의 두광에 나타난 모습이 서로 다르게 연출되게 된다. 이것이 문양을 보는 재미이다. 문양은 사실상 그 기물의 용도, 재질, 시문하는 도구에 따라 다른 효과를 지니게 되며 이를 어떻게 표현하였는가에 따라서도 다른 느낌이 나게 되는 것이다. 백제문양의 특징을 단적으로 표현하기는 힘들다. 그것은 각 문양이 앞에서 지적했듯이 기물의 용도나 재질 등에 따라 다른 분위기를 나타내고, 그 문양이 또 어떤 문양과 함께 묘사되느냐에 따라서도 다르게 해석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다양성이 문양의 일반적인 특징인 동시에 백제문양의 특징이기도 하겠다. 한편, 백제문양에서 보이는 특징 중 하나는 연화문수막새에 보이는 둥글게 부풀어 오른 꽃잎의 부드러운 곡선미, 서산마애삼존불상에서 보이는 선들의 유연한 흐름과 둥글둥글한 조형감각을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무령왕릉 금속공예 출토품들은 예리하고 정제된 감각 또한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백제문양은 문양이 보여줄 수 있는 특징인 부드러움과 날카로움, 유연한 곡선미와 정제된 직선미, 과감한 생략과 강조를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백제의 건국설화
중국 측의 역사서인 수서(隋書)에는 백제를 간략하게 소개한 [백제전(百濟傳)]이 있는데, 거기에는 처음에 백여 호(戶)가 바다를 건너[百家濟海] 남하하여 나라를 세웠기 때문에 백제라고 하였다고 쓰여 있다. 백제의 국호에 대한 삼국사기와 수서의 설명 가운데 어느 쪽이 맞는 것인지는 아직 가려내기 어렵다. 양쪽 모두 설화에 입각한 설명이기에, 어쩌면 양쪽 모두 잘못된 설명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백제가 처음부터 백제(百濟)라는 국호를 사용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다. 삼국사기에 처음 나오는 백제의 국호는 십제(十濟)이다. 조금 길긴 하지만, 백제의 건국과 관련된 삼국사기의 기록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백제 시조 온조왕(溫祚王)의 아버지는 추모(鄒牟)로서 주몽(朱蒙)이라고도 하는데, 북부여(北扶餘)로부터 난을 피해 졸본부여(卒本扶餘)에 이르렀다. 졸본부여의 왕에게는 아들이 없고 단지 딸만 셋이 있었다. 왕이 주몽을 보더니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고 둘째 딸을 시집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졸본부여의 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잇고 두 아들을 낳았다. 맏아들을 비류라 하고 둘째 아들을 온조라고 하였다.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이 와서 태자가 되매,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두려워하다가 마침내 오간(烏干)·마려(馬黎) 등 10명의 신하와 함께 남쪽으로 가니 백성 가운데 따르는 자가 많았다. 드디어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에 올라 살만한 땅을 바라보았는데, 비류는 바닷가에서 살고 싶어 하였다. 10명의 신하가 간언하기를 "생각컨대 이곳 하남(河南)의 땅은 북쪽으로 한수(漢水)를 끼고, 동쪽으로 높은 산악에 의지하며, 남쪽으로 기름진 들을 바라보고, 서쪽으로 큰 바다에 막혀있으니, 그 천혜의 험준함과 땅의 이로움은 좀처럼 얻기 어려운 지세입니다. 이곳에 도읍을 만드는 것이 좋겠습니다"고 하였다. 그러나 비류는 신하들의 간언을 듣지 않고 그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彌鄒忽)로 가서 살았다. 온조는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에 도읍하였다. 10명의 신하로 하여금 돕게 하고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라고 하니, 이때가 전한(前漢) 성제(成帝)의 홍가(鴻嘉) 3년이다.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히 살 수 없었는데, 위례성으로 돌아와 보니 도읍이 안정되고 백성들이 편안하였다. 마침내 비류가 부끄러워하고 후회하다 죽으니, 그 신하와 백성이 모두 위례성으로 돌아왔다. 백성들이 올 때 즐거이 따라왔다 하여 나중에 국호를 백제(百濟)로 바꾸었다. 그 세계(世系)가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부여(扶餘)를 성씨로 삼았다.

삼국사기 [백제본기(百濟本紀)] 온조왕 즉위년조. 위의 기록은 내용상 백제의 건국설화라고 하여도 무방한데, 고구려·신라의 그것과 비교한다면, 매우 특이하다고 할 만하다. 즉, 백제의 건국설화-온조설화(溫祚說話)에는 묘하게도 신비라든가 기적과 관련된 부분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매우 사실적이고 소탈한 방법으로 백제 건국을 설명하고 있다. 이는 백제의 건국 설화가 뒤늦게 채록되었거나 중국화 된 합리주의적 시각에서 채록되었기 때문인 듯하다. 바로 이러한 점에 주목하여, 백제의 건국설화가 고구려, 신라의 그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욱 사실에 가깝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주목되는 것은, 위의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백제의 국호는 애초 십제(十濟)였으며, 나중에 국력이 더욱 커지자 백제(百濟)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십(十)에서 백(百)으로' 바뀌었다는 것인데, 이와 같은 설명이야말로 중국화 된 시각, 곧 한자(漢字)에 입각한 해석이자 설명이라고 하겠다.

Ⅱ. 답사지 개요
1. 한국고건축박물관
이 박물관은 중요무형문화재 제74호로 지정된 인간문화재 대목장 전흥수씨가 1998년에 개관한 사설박물관이다. 박물관에 전시된 작품은 국보나 보물로 지정된 고건축문화재를 실제모형의 1/10, 1/5로 축소 제작하였다. 제1,2전시관은 고려시대 건축양식으로 축조 하였으며 정문도 강릉의 객사문을 그대로 옮겨놓았다. 우리민족 고유의 건축미를 응집 표현하여 고건축에 대한 국민의 관심을 높이고 세계인들에게 그 우수성을 홍보하기 위해서 건립된 국내 최초 유일의 건축박물관이다.
1 전시관
제1전시관에는 삼국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국 내의 대표적인 사찰, 탑, 불상 등 17종의 축소모형 100 여점이 전시되어 있으며 국보 제1호 남대문을 비롯한 조 사당, 도갑사 해탈문, 강릉 객사문 등의 다양한 건축물을 감상 할 수 있다.
2 전시관
제2전시관에는 국보와 보물로 지정되어 비교적 많이 알려진 사원건축 축소모형을 전시하고 있으며 무위사 극 락전, 부석사 무량수전, 봉정사 대웅전 등의 건축물의 축 소 모형을 자세히 살필 수 있다.
야외전시관
한국고건축박물관 야외에는 객사문과 전통 팔각정 양식을 그대로 복원해 놓고 있다.

2. 보부상유품전시관
지정별 :
중요 민속자료 제 30호
시 대 : 조선 후기
수 량 : 1괄 25점
소재지 :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예덕상무사라는 것은 고려 말 ~ 조선 초부터 조직되어 전해 내려오는 예산, 덕산 지방의 보부상을 관리하던 정부관서이다. 보부상은 보상과 부상을 뜻하며, 시장을 중심으로 행상하면서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서 교환경제를 매개하던 전문적인 시장 상인이었다. 한일합방으로 일본관헌에 의하여 보부상은 축출되었으나 예산. 덕산 지방에서는 "예덕상무사" 라는 이름으로 꾸준히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이 전시관에는 보부상 유품 중 우리역사, 사회, 민속, 상업 경제사 등에 연구 자료가 될만한 것을 보관하고 있다. 소장된 유품은 도장 7개, 청사초롱 철구 1쌍, 공문 16권 등이다.

보부상은 고대사회 이래 상품 집산지에서 구입한 일용 잡화물을 지방의 시장을 돌아다니면서 소비자에게 파는 행상인을 뜻한다. 직접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를 이어주는 전문적인 상인이며, 일종의 행상조합으로서, 원래 부상(負商)과 보상(褓商)의 두 개의 상단(商團)으로 구분되었고 취급하는 물품도 각각 달랐다. 부상은 나무그릇·토기 등과 같은 비교적 조잡한 일용품을 상품으로 하여 지게에 지고 다니면서 판매하였으므로 '등짐장수'라고도 한다. 이에 비해 보상은 비교적 값비싼 필묵, 금·은·동 제품 등과 같은 정밀한 세공품(細工品)을 보자기에 싸서 들고 다니거나 질빵에 걸머지고 다니며 판매하였으므로 '봇짐장수'라고도 한다. 부상의 기원은 고대사회에서 주로 사람의 머리·등을 이용하여 물품을 운반 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3. 화전리사면석불 (보물 제794호)

문화재명 : 예산 화전리사면석불
종 목 : 보물 제794호
시 대 : 백제
크 기 : 높이 3.15m
소재지 : 충청남도 예산 봉산면 화전리
1983년 충청남도 예산군 봉산면 화전리에서 발견된 것으로 돌기둥 4면에 불상이 새겨져 있는 백제시대 유일의 사면불(四面佛)이다. 그 조각 솜씨가 아주 수 려해서 널리 알려진 백제미소의 대명사 서산 마애삼 존불에 뒤지지 않음을 한눈에 알 수 있다. 그런데 안 타깝게도 이 석불은 상호나 수인이 온전한 것이 하나도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물 제794호로 지정되었다. 사면불은 일명 '사방불'이라고도 하는데, 동·서·남·북의 방위에 따라 사방 정토에 군림하는 신앙의 대상인 약사불, 아미타불, 석가불, 미륵불을 뜻한다.

남면에는 본존불로 생각되는 여래좌상이 있고, 나머지 면에는 여래입상이 각각 1구씩 새겨져 있다. 머리 부분은 많이 훼손된 채 서향과 북향만이 남아있고, 따로 끼울 수 있도록 되어있는 손은 모두 없어졌다. 4구의 불상은 모두 양 어깨에 옷을 걸치고 있으며 가슴부분에 띠 매듭이 보인다. 옷 주름이 매우 깊고 가슴아래에서 U자형으로 겹쳐 있다. 머리광배는 원형으로 불꽃무늬·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백제 특유의 양식이다. 머리 뒤로 두광은 연꽃무늬지만 전체적으로는 불꽃이 치솟는 듯한 광배를 두른 좌상이 있는데 가장 크고 조각도 선명해서 본존이라 할 수 있다. 부서져 나가기도 하고 많이 닳기도 해서 세세한 부분은 알 수 없으나 체구도 당당하고 전체 윤곽은 분명하다. 얼굴과 손이 없는데 손을 끼우던 구멍 자리가 있어 따로 제작해 끼웠던 것임을 알 수 있다. 특이한 점은 불두와 두광 사이에 공간을 두어 조각한 것으로 부분적으로 두리새김 수법을 썼으며 이는 다른 불상들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점이다.

백제는 웅진에 수도를 두고 고구려와 화친했을 때에는 중국과의 교역을 육로로 했다. 그러므로 이 길은 문물이 가장 먼저 들어오는 곳이었다. 예산 화전리 사면석불은 서산 마애삼존불과 함께 백제의 활발한 중국문물교류와 선진문물을 수용하여 자기 문화를 만들어 내는 백제의 역량을 보여 주는 중요한 유물들이다.

4. 향천사
향천사는 백제 때 옛 절이며 백제의 국운이 다할 무렵인 656년(백제 의자왕 16)에 의각(義覺)스님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스님이 금오산 향로봉 아래에 도착해서 절터를 마련하고자 배에서 한 달 동안 지극 정성으로 예불을 올리던 어느 날, 금 까마귀 한 쌍이 날아와 배 주위를 돌고 사라지기에 뒤를 밟아보니 지금 향천사 자리에서 물을 마시고 있었다. 이를 기이하게 여겨서 주위를 살펴보니 향내음이 그윽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산 이름이 금오산이며 절은 향천사가 되었다고 전해온다. 향천사는 임진왜란 당시 화재로 전소되었다가 멸운대사에 의해 중건되었다. 오랜 세월 잦은 보수와 증축으로 사찰의 원형이 많이 사라졌다.

현재 경내에는 충남도 지정문화재 자료 제173호로 지정되어 있는 향천사 천불전과 174호인 향천사 9층 석탑이 있다. 천불전에서 서쪽으로 70여m 떨어진 곳에 지방문화재 179호인 부도 2기(基)가 있다. 1기는 백제말기 고승 의각스님이고 다른 하나는 임진왜란 당시 승군을 조직해 금산전투에 참가했던 멸운대사의 부도 1기로, 의각 부도는 조각이 정교하며 신라나 고려 때 것과는 전혀 다른 작법을 보여준다.

각 면마다 불교의 법을 수호하는 신들의 모습을 조각하였고 윗 받침돌에는 아래받침돌과 대칭되는 연꽃이 새겨져 있고 위로 들려있는 지붕돌은 윗면의 여덟모서리마다 조각을 돌출되게 새겨 아름답게 꾸며 놓았다.

천불전에는 1516기의 불상을 모셨는데 문을 열자마자 처음 만난 불상으로부터 자기 나이만큼 오른쪽으로 세어서 만나는 불상이 자신의 배필 얼굴이라는 이야기가 전한다.

소장문화재 :
향천사 부도 (충청남도 지정문화재 자료 제179호)
향천사 9층 석탑 (충청남도 지정문화재 자료 제174호)
향천사 천불전 (충청남도 지정문화재 자료 제173호)

[서울신문 서동철 문화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38) 예산 향천사 멸운대사 부도

서양의 묘지에서는 주인공의 얼굴을 새겨놓은 무덤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언젠가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네프스키수도원 묘지를 찾았을 때도 문호 도스토옙스키와 작곡가 차이콥스키·무소르그스키·글린카의 무덤에 예외 없이 흉상이 세워져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오스트리아 빈의 중앙묘지에 있는 모차르트의 기념물에는 얼굴 옆모습이 돋을새김되어 있고, 브람스 무덤에는 턱을 괴고 생각에 잠긴 그의 모습을 조각해 놓았습니다. 물론 같은 묘지에 묻힌 베토벤과 슈베르트의 무덤처럼 하프나 음악의 요정같은 상징적인 장식만 되어있는 것도 있었지요.

우리나라에는 무덤에 주인의 얼굴을 새겨놓는 전통은 없었던 듯 합니다. 하지만 큰스님의 사리를 모신 부도를 일종의 무덤으로 볼 수 있다면, 충남 예산 향천사(香泉寺)에 있는 멸운대사 부도는 유일한 사례가 될 것입니다.

예산(禮山)은 백제시대에는 오산(烏山)으로 불렸습니다. 이 오래된 땅이름의 흔적은 지금도 예산의 안산인 금오산(金烏山)에 남아있지요. 향천사는 이 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백제 의자왕 16년(656년) 의각대사가 세웠다고 창건 설화는 전합니다.

의각 스님은 당나라에 유학한 뒤 불상을 모시고 돌아와 석달 동안이나 절 지을 자리를 찾아다녔다고 하지요. 어느 날 금빛 까마귀(金烏) 한 쌍이 날아가는 곳을 따라갔더니 향기로운 샘물(香泉)이 있어, 절을 짓고 산 이름을 금오산이라고 붙였다는 것입니다.

옛날부터 예산과 금오산, 향천사가 서로 떼어놓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지금도 읍내에서 걸어서 오를 수 있을 만큼 가깝고, 풍광도 뛰어난 향천사와 금오산은 주민들의 가장 훌륭한 휴식처이자 등산코스가 되고 있지요.

향천사에는 두 기의 옛 부도가 있습니다. 부도 밭은 절에서 개울 건너 100m쯤 떨어진 언덕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오른쪽의 전형적인 조선시대 부도가 멸운대사 것입니다. 몸통의 정면에 '멸운당대사 혜희의 탑(滅雲堂大師惠希之塔)'이라고 새겨놓았지요.

가까이 다가가 보면 팔각 지붕돌의 정면으로 내민 추녀마루 끝에 작은 인물상이 하나 조각되어 있습니다.

사실성이 느껴지는 얼굴 모습은 왕방울만 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코가 커지는 바람에 다소 희화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장난스럽지는 않습니다. 전체적으로는 고승다운 품격에 연륜이 더해져 너그러운 인상을 풍기지요.

향천사에는, 멸운대사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승군을 조직하여 금산전투에 참여했고, 전란이 끝난 뒤에는 불타버린 절을 중창했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합니다. 하지만 멸운대사 부도에는 숙종 34년(1708년)에 해당하는 강희 4년에 세웠다는 기록이 새겨져 있습니다. 임진왜란(1592∼1598)과는 100년 이상의 시차가 있지요.

지금은 수덕사가 보관하고 있는 향천사 동종에 숙종 28년(1702년)에 만들어졌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멸운대사가 주석하며 대대적으로 절을 중건한 시기는 숙종대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높이 102.6㎝의 향천사 동종은 일제에 공출되어 예산역 까지 실려 갔다가 광복을 맞아 극적으로 되찾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멸운대사 탑은 새로운 부도의 양식을 창조한 것으로 보아야 하겠지요. 하지만 새로운 시도가 후대로 이어지지 않은 것은, 멸운대사 탑에서 보듯 초상을 새겨 놓고 보니 '깨달은 자의 신성함'보다는 '인간의 모습'이 오히려 강조되었기 때문은 아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dcsuh@seoul.co.kr / 기사일자 : 2007-10-0423 면

※ 도움주신 분 :
- 예산군청 문화관광과 하헌진, 민수영 님
- 한국고건축박물관
- 향천사 총무스님

- 자료 도움 받은 곳 -
문화재청 홈페이지 www.cha.go.kr
예산군청 홈페이지 www.yesan.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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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누리 제4유형: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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